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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公正)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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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공정(公正)의 감각

정약용은 정치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정치의 근원을 따져 묻는 「원정(原政)」은 이런 반성의 결과다. 

“정치란 바르게 한다[正]는 말이다.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토지의 이로움을 두루 겸해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토지의 이로움을 받지 못해 가난하게 사는가? (...)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강대한 세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비대해지고, 누구는 취약한 상황에서 더 빼앗겨 사라지고 마는가?” 

차승현 작가_정장.jpg
차승현 작가

 

다산은 ‘똑같은 우리 백성’[均吾民也]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평생 선하지 않아도 멀쩡하게 잘 살고, 어떤 이는 평생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도 제대로 복을 받지 못하니 상선벌악(賞善罰惡)이 불공정함을 되짚기도 한다. 

「원정」은 치우친 붕당을 없애고 공도(公道)를 넓혀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우대하는 정치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마무리한다. 

정약용이 말한 공도는 정치의 공정한 길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공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산은 토지제도를 말할 때 균전(均田), 균산(均産)의 의미를 비판했다. 

농사짓는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토지를 운영하게 해야지, 국가가 일일이 민의 살림을 똑같이 챙길 수 없다는 말이다. 

“먼저 백성의 살림을 엿보고 부유한 자의 것을 덜어내서 가난한 자에게 보태고자 하니 이것은 이롭지 않은 헛된 일이다.”[先窺下民之產業, 欲損富而益貧者, 是無益之虛務也.] 

백성이 자신의 직업을 갖고 능력에 따라 자립하게 해야지, 처음부터 국가가 일률적으로 균전・균산을 추구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아마도 각자의 분수, 각자의 능력에 맞게 차등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유학자들이 생각한 공정의 의미였을 것이다. 


20세기 초 국권을 빼앗기고 해방 후에는 강대국의 냉전 갈등, 분단체제에서 삶과 사유의 위기, 가치의 급변을 경험했다.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는 삶의 균질적 흐름이 끊어진 현장들을 목격한다. 

좋든 싫든 이것은 우리가 가진 고유한 경험의 자산이다. 

균질적 평등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 엘리트적 위계, 능력주의 횡포를 거부하는 감정도 공존한다. 

내 삶의 충족이 타인의 삶의 충족과 함께 가야 한다는 신념도 사라지지 않았다. 

타인과 함께 하는 공공(公共)의 삶, 세상의 주인공으로 내가 가진 공정(公正)의 감각,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다수의 사람이 좋다고 해서 나에게도 반드시 공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공정의 상식이 내가 아닌 타인에게도 이로운 길인지 반문할 필요가 있다. 

공유할 수 없는 생각을 하는 타인이 많은 이곳, 우리 사회는 내 공정의 감각을 시험할 좋은 잣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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